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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진호
온스테이지 346번째 표진호
재즈
네이버문화재단
㈜디지탈레코드
2017.07.11
01. 근리한 지점 (온스테이지 ver.)


ONSTAGE. 불친절해도 좋은 음악




[온스테이지 영상(click)]


언젠가부터 음악은 왜소해졌다. 세상은 갈수록 음악으로 가득 찼지만 음악은 오히려 시시해졌다.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들을 수 없는 음악이 없어지자 귀가 쉬운 음악 쪽으로만 쏠려갔던 탓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 재미있는 음악이어야 사랑받았다.

간명한 멜로디와 흥미로운 드라마가 있는 음악, 뮤직비디오가 독특한 음악,

스스로 이벤트가 되고 퍼포먼스가 되는 음악들이 득세하는 동안 작아진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뮤지션들도 작아졌다. 뮤지션보다 기획자가 더 커졌다. 동시에 음악보다 음악을 듣는 사람이 더 커졌다.

음악이 음악을 듣는 사람보다 커서는 안 될 것처럼 여겨진 탓이다. 음악은 스스로 키를 낮춰야만 했다.

자신보다 큰 음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대체 이 음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심하는 이는 희귀해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쉽게 열리지 않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기획자보다 뮤지션이 더 큰 음악. 아니, 그저 뮤지션이 노닐고 싶은 대로 노니는 음악.

그의 손과 발과 목소리와 마음이 향하는 대로 주저 없이 내달리는 음악을 누군가는 만들고 연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음악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고 끝내 다 알 수 없는 무궁무진의 세계, 그 비밀과 품격을 다 잃지 않는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표진호의 재즈이다.

첫 곡을 시작하자마자 표진호는 스캣을 퍼붓는다. 스캣, 재즈 보컬의 즉흥연주.

피아노 연주는 단순한데 표진호의 스캣은 현란하고 분주하기 그지없다. 피아노와 보컬의 대비.

간명함과 현란함의 대비. 이 각각의 소리와 구조, 충돌과 독립을 즐기는 것이 재즈를 즐기는 한 방법일 것이다.

재즈는 이미 오래된 음악이고 더 이상 새로울 리 없는 음악이라고 치부하곤 하지만 글쎄,

표진호와 이명건(피아노), 김인영(베이스), 최요셉(드럼)의 연주를 보면 재즈를 옛 음악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사실 특별한 테크놀로지의 개입은 없다. 각자 자신의 악기를 연주할 뿐이다. 사운드를 변형시키지 않는 정직한 연주이다.

오히려 자신의 악기를 멈추고 다른 이들의 연주를 지켜볼 때가 많은 음악이다. 음악은 꽉 차기보다는 듬성듬성해 보인다.

멜로디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지도 않는 음악.

미리 모든 것을 약속해두었다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것 같은 음악.

그러나 이 자유로움의 무정형과 무계획이 음악을 특별하게 만들고 뮤지션을 살아있게 한다.

듣는 이를 의식하기보다는 뮤지션 자신에게 충실한 음악. 뮤지션부터 자유로워 듣는 이 역시 자유롭게 만드는 음악이 재즈이다.

그러니 곡 제목에 너무 메이지 말자.

'Giant Steps', 'You Don't Know What Love Is', '근리한 지점'이라는 제목이 어떤 뜻이고,

원창작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이 곡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도, 소니 롤린스(Sonny Rolins)도 잠시 잊자.

여기는 2017년의 한국이고 오늘의 주인공은 표진호와 그의 음악 동료들이다.

표진호의 스캣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이명건의 피아노가 홀로 내달리면 함께 따라가자.

그 속도감이 선사하는 자유로움에만 집중하자. 피아노에 보컬이 더해지고,

베이스와 드럼이 어울릴 때 멈칫거리는 악기와 나아가는 악기,

스스로 중심이 되는 연주와 탈주하는 연주 사이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만끽하자.

흩어지는 듯 모이고, 모이는 듯 흩어지며 반복하고 치고 빠지는 혼곤한 난장.

그새 노래 역시 하나의 소리가 되고 악기가 되는 진경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다. 표진호는 자신의 목소리를 연주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즉흥을 수행하는 과정은 파격적이고 묵직하며 호화롭고 싱싱하다.

이 상반된 질감을 모두 완벽하게 생성하며 그는 이렇게도 음악이 된다는 깨달음, 이렇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감동을 안겨준다.

표진호와 그의 재즈가 특별한 이유이다.

'Giant Steps'가 10분에 이르는 길이를 단숨에 넘나든 뒤,

이어지는 'You Don't Know What Love Is' 역시 7분이라는 길이가 만만치 않다.

발라드에 가까운 곡은 이따끔의 보컬 즉흥연주와 함께 스윙함으로써 이 곡이 표진호의 재즈곡임을 증명한다.

당신은 사랑을 모른다는 탄식이 경쾌해지면서 트리오 연주의 인터플레이를 맛깔스럽게 살리는 간주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매혹적인지.

그리고 카페 반쥴로 공간을 바꿔 표진호가 클라리넷과 보컬을 멋지게 연주하는 '근리한 지점'은 19분에 이르는 길이로 압도한다.

아니, 이 곡이 특별한 이유는 길이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넷과 피아노가 예고하는 서늘한 서정에 베이스가 부드럽게 포개지고

드럼과 피아노가 곡의 자유로운 서사를 본격화하는 각각의 순간, 견고한 공기가 순식간에 해체되고 헝클어졌다가

다시 밀도 높게 침잠하며 빚어내는 집중과 파격의 변화무쌍을 수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악기 하나만으로도 가득 차고, 은밀하며, 아름다운 순간이 있고 함께 농염해지는 순간이 있다.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돌연 판을 뒤흔들어버리는 파격이 있다.

분산과 통합, 긴장과 평화, 그 찰나에 몰입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음악이다. 일부러 기획할 수 없는 음악이고,

예고할 수도 없는 음악이다. 시작과 끝을 분리하지 않는 음악. 끊임없이 빠져들면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음악.

음악이 스스로 얼마나 독립적이고, 독자적이며, 엄정한지를 보여주는 음악이 아직 우리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세상 모든 음악이 친절할 필요는 없다. 음악은 종종 불친절하고 오만해도 괜찮다.